신앙을 지키려면 목숨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의 순교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믿음을 선택했을까? 단지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만으로 많은 이들이 반역자로 지목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 책은 병인박해 때 산 채로 구덩이에 묻혀 치명한 무명 순교자들의 이야기다. 저자는 신부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1년 차 보좌신부가 아이들을 이끌고 해미국제성지를 방문하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의 보좌신부는 새벽미사를 드리기 위해 잠에서 깨는 일조차 버겁다. 마음속에 자질에 대한 고민과 자책이 가득한 채로 도착한 성지, 아이들은 순교자의 유해에서 반짝이는 흰빛을 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 빛도 보이지 않았다.
해미국제성지에 봉헌된 순교자들은 신앙을 증거하고 치명한 이들이지만 처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유교와 그에 기반한 신분제 사회에 익숙한 당대의 평범한 필부필부에 가까웠었다. 그러나 마을에 이사 온 천주교인 부부의 행실에 감화되고, 처음에는 경계하고 배척했던 나병 환자에게 도움을 받으며 그들의 마음은 자연히 천주를 향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마을은 교우촌이 되었고, 신자들의 이마에서 인호를 볼 수 있는 특별한 아이 필성도 성장하여 주교를 도와 천주교인으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천주교인의 운명은 한 치 앞길을 가늠할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박해자의 교묘한 수법에 참혹하게 살해당했고, 필성은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고자 다른 교우촌 위치를 밀고하고 말았다. 죄책감에 주님을 원망하며 방황하던 필성은 어느 날 다정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에 회심한 필성은 자신의 능력을 살려 교우들을 지키고자 하지만, 특별한 능력과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는 귀한 경험에 대한 자만심이 그의 능력을 앗아가고 말았다.
겸허한 마음으로 원머리에서 고된 염전 일을 하며 살아가던 필성에게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이 방치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해미로 향한 필성의 눈에는 다시 그 빛이 보이고, 인호가 천주님의 자녀라는 징표로서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한 신자들이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임을 깨닫는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한층 격화된다. 집요한 수색에 필성과 교인들도 결국 체포되어 구덩이에 생매장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도망치거나 숨으려 하지 않았으며, 기쁜 마음으로 당당하게 구덩이로 들어갔다. 죽음이 주님 곁에서의 영생으로 이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담신부님께 유해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보좌신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하느님께서자신을 부르신 뜻을 믿고 남은 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인호를 보게 된다. 필성은 자신의 특별함을 타인과 비교하며 우쭐함을 느꼈고, 그것은 주님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필성은 인호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보좌신부처럼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까 지레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은 용서하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뜻을 믿지 못함이다. 의심으로 심란한 보좌신부의 눈에도 인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였을 때 그들은 인호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무덤 속 생매장당한 이들의 이름은 여전히 대부분 무명이다. 그들이 명예욕이나 세속적인 향상심으로 선택한 행동이었다면 지금 이 결말은 그저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맡겼고, 믿음 속에 치명하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박해시대를 뛰어넘는 믿음의 씨앗이 되었고, 지금도 주님과 합일한 온전한 신앙의 기쁨으로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소설 『해미』는 저자의 유창한 지역어로 되살아난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삶을 되짚으며, 그들과 그들이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접하게 된다. 모두가 제각기 욕구와 사정이 있다. 위태로운 사람을 눈앞에 두어도 요동치는 내 뱃속 사정은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과 선택에 대한 믿음이 그 사람의 삶을, 그리고 타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주목해 보기를 바란다.
류은경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8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가위」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외 작품으로 『이산 정조대왕』(디오네), 『선덕여왕』(MBC프로덕션), 『노견만세』(MBC프로덕션), 『무신』(MBC C&I), 『불멸』(책마실) 등이 있다.
책머리에 1장 괴물과 천사 2장 빗나간 계획 3장 기울어진 십자가 4장 달아나지 않는 죄인들 5장 다시 부는 바람 맺는글 후기
인호의 빛을 통해 김진식은 신심을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이마에서 빛나는 흰빛이 누구보다 찬란하다고 필성이 말해줄 때마다 내심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동안 어리석었네. 믿음은 그 자체루 귀헌 것인디, 감히 넘하구 비교허는 우를 범했어.” --167쪽.
천주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은 매 상황마다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삵에게 점촌을 안내한 것도, 엄마의 숨을 제 손으로 끊어버린 것도 필성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그래 놓고 나는 신을 원망하고 있었구나. 죄를 지어놓고 왜 죄를 짓게 만들었냐며 따져 물었고, 그분에게서 멀어지기까지 했었다. ‘나는 너희와 멀어진 적이 없다. 늘 너희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라.’ --113쪽.